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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참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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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림 댓글 0건 조회 726회 작성일 14-08-11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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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교회 수련회에서 알게 된 언니에게서 테니의 솜사탕을 알게 되어서 이렇게 사연을 올려봅니다.
우선 먼저 저는 ENFP 성향이며 성질은 잘 모르겠습니다. 스물 여덟 살 여자입니다.

여덟 살 때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을 하시고 아버지가 저와 제 동생을 키우시게 되었는데 이혼의 요인은 어머니께서 여호와의 증인을 믿는다는 것 때문이었지만 그 이혼의 원인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버지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성격이 다혈질적인데다 말도 포악하게 하십니다. 자기가 옳고 그른 것에 있어서는 즉각적으로 불같이 처단을 하며 권위주의적이셔서 옳은 자기에게 부당함을 드러내는 엄마를 처단하듯 손지검을 항상 해오셨습니다.

엄마가 여호와의 증인으로 믿게 되었고 이것을 더욱 붙들게 만든 것은 아버지의 강압적인 면과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는 그 판단 때문에 더이상 대화와 이해는 찾아볼 수 없었기에 자식을 내버리고서라도 엄마는 어떤 사상이나 진리에 자신을 보고받고 싶어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는 이혼을 하신 이후로 매주일 교회를 꼬박꼬박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소싯적에 할아버지께 두들겨 맞아가면서도 큰아버지 작은아버지와 함께 교회를 다니며 세례를 받기도 했지만 객지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세상적인 타락을 좇아 하셨고 성격이 별나고 포악하여 싸움하며 다니는 반면, 경우에 그른 짓은 하지 않았기에 아무도 누구하나 아버지에게 뭐라할 사람이 없이 사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남들보다 아주 늦게 결혼을 하셨고 마음에는 다른 분이 계셨지만 자식들을 위한 조건으로 볼 때에 어머니와 사는 것으로 결정을 하고서 아무것도 모아온 것 없이 살림을 시작했는데 하루 하루 살면서 혼자 살 때와는 다르게 돈이 모이지 않는다는 것, 나와 사는 이 여자가 아이는 잘 기르겠지 했는데 작은 계산 하나 하는 것까지도 잘 못한다는 것, 식품영양학과를 나왔다는데 요리를 못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는 살아가면서 실망이 드는 것이 많아 엄마를 많이 괴롭히며 무시하는 언행을 많이 했습니다.

그것이 쌓여버린 엄마는 어느하나 위로를 받지 못한 채 있다가 아들을 낳으면 자기가 무시당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여 여섯 살 터울인 제 남동생을 낳으셨고 아들을 낳았지만서도 어떤 것 하나 엄마 뜻대로 되어가는 게 없다 생각하셔서 먼저 아버지께 이혼신청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들었습니다.

이혼을 하시고 아버지가 교회를 다니시면서 믿음의 증표될 사건들도 있고 하였지만 어머니의 그늘 없이 저와 제 동생은 온갖 폭력에 노출되었고 공부를 못한다는 것으로 심히도 때리시고 공부를 다 끝내지 못해서 나머지 공부를 하면 집으로 가는 길부터도 저는 아주 심한 공포로 떨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어린 아이였지만 비가 오는 날만 되면 아주 우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고 아버지의 분이 풀릴 때까지 고스란히 맞아야 할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이쯤하면 그만 하고 싶은데도 아버지의 분은 풀리지가 않았고 저는 구석에서 눈물에 콧물을 흘리며 벌벌 떨고 서 있지도 앉아 있지도 못한 상태에서 허리띠나 방망이 등으로 맞아야 했습니다. 화가 나면 풀려고 생각하기보다 내질러야만 하는 아버지와 이 이유도 알 수 없는 심판의 시간이 쉽게 끝나지 않는 것 때문에 저와 제 동생은 도망갈 틈이 없이 아버지께 잡혀서 살았습니다.

돈이 없고 어려운 살림이라는 것을 알면 공부라도 잘 해야 되는데 그런 깨달음이 없다시며 나무라셨고 내 말이 틀렸냐고 하십니다. 틀리지 않았다고 대답을 해야 했습니다. 대답을 안 하면 욕하고 또 때리시니까요.그러면 아버지는 틀린 말이 아닌거 알면서 왜 공부를 안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저는 거기에 딱히 할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답을 하지 못한다며 맞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말을 무시한 거라면서 말입니다. 그것은 지금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학교에서는 심한 따돌림으로 오랫동안 지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에게 두들겨맞고 일어나서 학교를 가려 하면 기운이 나지 않았습니다. 세수를 늦게 하고 옷을 늦게 갈아입는다고 아침부터 화를 내는 아버지를 피해 그렇게 학교에 가면 저는 또 제 공책이나 노트에 낙서한 흔적이 있고 아끼는 지우개나 연필이 없어져 있었으며 친구들이 둘러 싸서 이유없이 욕을 하곤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말없고 과묵한 동생이 어느 날 저에게 저와 비슷하거나 더 심한 폭행을 당했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는데 동생이 불쌍해서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울한 학교생활을 마치고 저는 저의 이 우울한 기억들을 승화시켜보려고 대학 원서를 넣을 때 문예창작과에 지원했지만  떨어졌습니다. 그리고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과를 들어가서 국문과랑 복수전공을 하였습니다. 공부로 봐서는 국문이나 문학 공부가 재미있었지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것은 음악이나 글이었습니다. 사실은 활자보다도 음악을 좋아했고 소설같은 것 보다도 시를 좋아해서 공모전에 3년동안 쓴 시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되어진 것은 없었습니다.

저는 매순간 제 안에 어떤 큰 힘이나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항상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흘러 터져버려 나 자신을  바꿔버렸으면 하는 그런 열망이 있었지만 그것을 터뜨릴 수 없는 환경적인 것들 때문에 언젠가는 하나님이 이런 상황에서도 문을 열어주시겠지 하고 기다린 기다림과 아버지를 참아왔습니다.

대학교 4학년이 되어서 무엇을 어떻게 직업으로 가질 것인지에 대해 아버지 앞에서 청사진을 내 놓아야 했습니다. 하고 싶지도 않은 한국어교육을, 단지 아버지를 화나게 만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교수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럭해서 안 되면 어떡할거냐는 아버지의 말씀에 저는 또 말이 막혀버렸습니다. 안 되면 어떡할 것인지에 대한 대비책도 생각하지 않냐며, 생각이 거기까지밖에 안 된다며.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무엇이냐며 물어보면 대답은 해야 하겠는데 아버지의 기준에서는 무엇 하나 돈 벌만한 능력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저는 어떤 선택을 하든지 잘 해보라는 말이 절실하였고, 믿어주는 믿음이 있다면 할 수 있는 것 안에서 최선을 다해 이뤄내서 인정받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저의 생각을 믿어주기보다 그 생각을 의심하며 확실할지 아닐지를 계산하였습니다. 저는 언제나 계산의 심판대에 서서 아버지의 짜증내는 온갖 말들을 들으며 내몰려야 했고 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제 동생 또한 취업을 중심으로 학교원서를 내어야 했는데 성적에 맞게 보내다 보니 동생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박계통의 과를 들어가서 하청에서 노동하는 그런 것으로 갈 수밖에 없고 그렇게 자신의 인생이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내몰리는 것이 싫어서 부들부들 떨면서 울고 저에게만 짜증을 내며 반항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욕하거나 때리거나 하면 이길 힘이 없었으니까요.

4학년 말이 되어 숨이 막혀오고 그런 압박과 욕설과 무시함이 절정에 달할 때에 저는 봉사단체에 들어가서 한국어교육 분야로 봉사하고서 논문을 쓰기 위해서 가겠다고 일부 거짓말을 하고 겨우겨우 캄보디아로 갔습니다. 그 곳을 가기 전까지도 저는, 만일 아버지가 옳고 제가 잘못된 것이라면 아버지를 참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주 끝까지 저를 이렇게 살게 하시지 왜 이제와서  이렇게 나갈 수밖에 없는지를 묻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저는 3년을 캄보디아에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유하였고 즐거웠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저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저의 사명이 무언지도 알지 못하며 스스로를 방관하였고 예배는 드렸지만 신앙적으로도 누구하나 잡아주는 사람 없이 혼자 지내다 보니 날이 선 상황에서 누군가를 상처주기도 하며 마지막을 썩 좋게 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한국에 도착한 지 한 달 정도 되어가는데 고층 빌딩과 한국 사회, 사람들, 거리 모든 것이 싫었고  아버지는 가뜩이나 동생이 연락을 하지 않는 것 때문에 짜증이 난 상태에서 제가 아버지를 흘겨보았다며 저에게 위협하시며 구속으로 몰아 넣으시더니 주먹으로 때리려 하셨습니다. 저는 흘겨본 일이 없는데 아버지 스스로가 착각하면서 화를 애써 증폭시켜 터뜨리려는 것이 보입니다. 저는 무섭기도 했지만 힘으로 누르려 하는 그 굴욕감에 비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집에 도착해서는 어떻게든 발 붙이고 잘 살아야지 했던 제 다짐들이 완전히 싹 사리지기 시작했습니다.

  제 집인 울산과 대학생활하던 부산이 너무도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고향에 돌아오면 정겹고 반가워야 할텐데 저는 집으로 오자마자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기 싫어했습니다. 왜냐하면 거리거리마다, 혼자서 많이 걸으면서 스스로를 다독이고 추슬렀던 기억들을 떠올릴 때마다 너무도 비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생은 제가 봉사활동을 간 지 6개월 후에 군대를 갔습니다. 제대를 하자마자 아버지의 간섭과 짜증, 폭언하고 무시하는 그런 소리들을 듣기 싫어서 바로 취업자리를 구했습니다. 집에는 들어가지도 않았고 회사 내의 기숙사에서 지냈습니다. 동생은 제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나에게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연락하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바통터치하듯 제가 집으로 오자마자 근 한 달 동안 아버지가 수없이 연락을 해도 전화를 받지 않았고 저 또한 그랬습니다. 아버지는 지금도, 동생이 자기에게 그동안 수없이 거짓말을 해 오더니만 결국 어머니한테 갔다고 생각해서, 왜 캄보디아 가기 전에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냐면서. 그런 이단 종교에 빠지게 만든 나에게 무슨 신앙이 있냐시는데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사실 어머니를 알건대 완벽하게 거짓말할 사람도 아니었고 그렇게 숨기며 살고 하실 분이 아니었으며 엄마한테도 전화했는데 확실히 없다고 해도 아버지는 믿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본인이 짜증을 낸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상처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잘못이지 틀린 말을 한 것이 아니기에 되려, 받아들이지 않고 눈물이나 흘리고 감정만 담아놓는 행동이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라 여기곤 합니다.

 저의 바람은 동생이 엇나가는 길을 걷지만 않으면 자기가 가고 싶은 데를 가고 먹고 싶은 것을 사먹고 배우고 싶은 것을 돈을 벌어 자유롭게 배우며 살길 원했습니다. 한편으로 저 자신을 생각하면 캄보디아 3년의 구속없는 생활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과 젊음이 어영부영 지나가버렸고 에너지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으며 왜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현실을 감당하면서 월에 얼마를 받느냐는 고민아닌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는 남들 따라 결혼을 해야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고 인생의 바르다고 하는 궤도 안으로 살아야 하는 것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대도록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키워왔는데, 성경 말씀에 대해서 얼마나 논하고 내가 그토록 알고 깨달은 깨달음을 너희한테 얘기해주고 심지어 목사도 설교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너희들에게 가르쳐줬는데도 그 말을 따라 실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없이 무시하느냐. 집 중심으로 돌아가야 되는 거 아니냐면서 너도 어디 갈 데가 없으니까 여기 붙어 있는거지 갈 데만 있으면 벌써 떠날거라 하십니다.
 오늘도 일터에서 돌아오셔서 수시로 정신적으로 자유로울 시간 없이 함부로 말을 내뱉고 화를 내고 짜증을 내며 결국 무시하며 단정내리시는 이것을 제가 참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과 함께 제가 무엇을 해야 할 지 큰 고민이 됩니다.

아버지는 대학원에 갈 것처럼 생각하지만 더이상 집에 있을 수가 없으며 공부는 하고 싶지만 한국어 계통으로 공부하고 싶지 않으며 더우기 아버지와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에서라도 밖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준비를 안할 수가 없어서 제가 간 봉사단체에서 사무직으로 캄보디아에 한 명 구한다는 말을 듣고 1차원서를 낸 상태이지만 거기를 정말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은 아니고 또다른 미래를 유예하기 위하여 될 지 안 될 지도 모르지만 넣어놓고 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모든 일에 있어, 선택은 할 수 없지만 주어진 것 안에서나 경험해본 것 안에서는 저와 적성이 아주 맞지 않는 이상 감내하면서 할 수 있습니다. 사회성이 그렇게 나쁜 편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매사를 뜻대로 선택할 수 없느냐에 대한 억울함이 있습니다.

교회 사람들은 어둡게 달라진 제 자신을 보면서, 저희 아버지 성격을 대충은 알기에 말들을 아끼시며 어른들끼리 저의 가정사를 이야기하는 가십거리만 만들어질 뿐 누구하나 저에게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는, 신기 어린 초입의 무당처럼 마구마구 쏟아내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지만 그런 에너지를 받아서 그 에너지로 쏟아내며 비워내고 싶은데 어떤 것도 뚫린 것이 없는 이 상태에서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이, 그리고 가정을 생각한다는 것이 너무도 어렵습니다.

저에게는 지금 작지만 봉사활동을 하고서 마친 목돈이 있고 가방은 쌀 대로 싼 상태입니다. 친구 집으로 가면 잠시 거기 있으면서 방을 구하고 거기서부터 제가 스스로 돈을 벌어 살아가야 할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락되지 않는 동생과 가정을 놓으면 자신을 버렸다거나 무시했다 생각하는 아버지 때문에 그것이 망설여지며

무엇보다도 오늘날에 어째서 이런 상황을 맞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말은 너무도 막연하게 들려서 싫고, 만약 하나님이 내 자유의지대로 하게 해 주셨는데 왜 진즉에 나가지 않았냐는 말씀을 하신다면 저는 제가 지키려 했고 견디려 애썼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던가 하고 회의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참아왔지만
더 참고 기도로써 준비해야 한다면
저는 이 상황을 더 오랫동안 버틸 자신이 없으며
이제 와서 무언가 풀린다고 한들
젊음을 뜻대로 쓰지 못하고 낭비해버렸다는 생각때문에 억울할 것 같고, 스스로의 인생을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예쁘고 꽃 같은 것들이 거진 지나가고서 무언가를 겨우 풀었다 한들 지금부터 시작하는 삶에 제가 어떤 에너지를 어떻게 내며 살겠으며
왜 이렇게만이 방법인지 하나님이 너무 원망스럽습니다.

아버지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느끼며 선택하며 일하며 사는 것은 안 될까요?

저는 연애란 것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는 그것까지도 너무 억울합니다. 언젠가 결혼에 자신이 없어서 안하고 싶다는 말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말로 어떻게서든 생각을 바꾸려 하시는지 수시로 나의 잘못된 점을 이야기함과 함께 결혼을 안 하려는 것은 죄라면서 성경에 대한 것 그리고 자기 생각과 깨달음과 설명을 장황하게 하십니다.

저는 어떤 부분으로든 잘못될 수 없습니다. 잘못되면 죄가 되며 아버지의 짜증의 단서를 주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미 지나갔고 다시 올 수 없는 내 인생을
누구도 아무도 지켜주지 못했고 뚫어주지 못했고 벗어날 수조차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결국 또 저의 실수와 잘못입니까.
아니면 제가 또 이 모든 상황에서 아버지와 상황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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